외할아버지

2025. 08. 25·published in 1일1글

엄마와 아빠 중에 누구를 좀 더 닮았냐고 하면 나는 엄마를 닮았고. 엄마는 외할아버지를 닮았다. 나는 외할아버지의 DNA를 많이 받은 셈이다.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하니 갑자기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와 내가 살아온 시대와 방식은 너무나도 다르다.

하지만 나는 외할아버지의 특이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그걸 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선비다. 천성이 학자, 지식인이다. 조선시대에 태어나셨으면 무조건 훈장을 하셨을 거다. 하지만 그는 조금 늦게 태어났기에 교장이 되었다. 1960년부터 2002년까지 교사로 일하셨다.

그의 공부 사랑은 정말 못 말리는데, 할아버지는 평생 동안 공부를 놓으신 적이 없다. 젊은 시절에는 오직 재미와 더 많은 공부를 위해서 일본어, 중국어, 히브리어(?!) 등을 섭렵했는데, 듣기 테이프 조차 없던 시절에 사전을 씹어먹으며 5개 국어를 마스터했다.

할아버지는 독서광이다. 우리 어머니도 국어 선생님으로서 한 책 사랑하시지만, 사실 할아버지에는 비할바가 못 된다. 아파서 진료를 받으러 가끔 서울이나 분당에 진료를 오시곤 한다. 하지만 병원 진료가 끝나고 3배는 더 긴 시간을 교보문고에서 보낸다. 홍성에는 교보문고가 없기 때문이다. 올라올 때마다 매번 책을 잔뜩 사가지고 가시는데 그렇게 즐거워보일 수가 없다.

공부를 좋아함과 동시에 전형적인 훈장님 스타일로서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시는데. 항상 겸손하고 자신의 지식을 나눠주는 것에 너무나 즐거워하신다. 그러나 항상 평생을 추구해오신 교육관과 생태관, 종교관을 반복하시는데다, 말을 한번 하면 끊지 않으시고, 다소 졸린 목소리 톤까지 더해져서 굉장히 졸음을 참기 힘들다는 점이 살짝 단점이다.

평생을 충남 홍성에서 풀무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일궈오시며 밤이나 낮이나 맨날 그 생각만 하시는 분인데. 할아버지의 이런 열정 및 학식 때문에 사실상 홍성의 홍동이라는 동네의 정체성이 만들어졌을 정도다. 마을에 도서관을 짓고 70년대에 유기농업을 도입하고,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생태농업 전문대학교를 세우고 등등..

이 기사를 보면 어떤 삶을 살아오신 분인지를 살짝 알수 있다.

  1. 진정한 교육은 지역일꾼 길러내는 것
  2. 홍순명 인터뷰

내가 할아버지를 안 닮은 부분이라면, 할아버지는 지독한 (이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상주의자이다.

유기농업이 빨갱이 취급받던 시절에 유기농업을 외치고,

대안교육이 꼴통학교 취급받던 시절에 대안 교육을 외치고,

조용한 시골마을에 아무도 될거라 생각하지 않는 대학을 짓는 일을 20년 넘게 해오며

목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도서관과 학교에 기부하는.. 가치 중심적인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 spoiled 되어 그렇게까지 가치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게 가장 큰 차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많은 DNA를 물려받았다. 국어에 대한 재능이라던가.. (생각해보니까 나는 국어를 가르치는 교장선생님의 딸인 국어 선생님의 아들..이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행복하다든가 등등..

사실 DNA 뿐만 아니라 문화적 유전자도 받았는데,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치신 풀무학교를 나도 다녔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입학했을 때는 이미 나이가 드셔서 퇴임하셨지만, 학교 곳곳에는 할아버지의 철학과 노력이 묻어있었고 나는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이상주의자인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그늘이 힘들고 젊은 시절의 자신을 괴롭게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도 학창시절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뭐라고 비유해야할까? 할아버지가 독립운동하시던 분이면 손자로서는 그걸 존경하면서도 그 높은 가치와 도덕관 근처에 가면 숨막히는 느낌? 나는 그렇게 못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자연히 같은 동네에 살고 시간날 때마다 학교에 오시는 할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했었지만, 20대 이후로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십수년이 지난 요즘은 오히려 내가 너무 현실에 물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확실히 나의 근본 뿌리를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었다는 실감이 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