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짧은 여유 시간에는 주로 휴대폰을 보지만, 긴 여유가 있어서 잘 쉬고 싶으면 주로 책을 본다. 이번 주말에도 침대에 누워 책을 보는 평화로운 시간이 있었다. 오랜만에 책장에 꽂혀있는 책이 눈에 띄었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나는 유발 하라리의 책을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의 20장 파트를 좋아한다. 역사를 훑으며 배우게 되는 것들을 ‘인생의 의미’라는 주제와 엮어내는 파트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읽었지만 여전히 좋았다. 띵하게 머리를 맞는 느낌이었달까. 침대에서 일어나서 메모를 해두었다. 이걸로 글을 써봐야지라고 생각하고 재료를 쌓아두었다.
하지만 재료만 쌓아두고 어디서부터 글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인생의 의미, 136억 년.. 너무 무거운 주제이긴 하다.
> 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야할까? 아예 부여하지 말아야하는 것인가?
하지만 언젠가는 내 생각을 꼭 써보고 싶은 주제다. 그래서 일단 재료부터 식탁 위에 꺼내어 본다.
다음은 책을 읽으며 내가 메모했던 부분들이다. 책 내용을 내 말로 써낸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제언>Chapter 20. 의미
> 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대에 따라 이 답은 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바뀌기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답은 무엇일까?
의미를 물으면 사람들은 ‘이야기’를 기대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야기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로 생각하고 우주도 ‘이야기’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는 영웅과 악당. 갈등과 해결. 클라이맥스와 해피 엔딩으로 가득차있다.
이야기는 이 우주의 드라마 속에서 내 역할은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우주의 드라마 속 내가 맡은 역할이 내 정체성이 되고, 내 경험에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면, 삶은 거대한 ‘생명의 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힌두교 서사시 <바가바드기타>에서는 모든 존재에는 업이 있으며 그 업(다르마)을 따르라고 한다. 나에게 주어진 다르마를 따르면 되고, 세상은 계속 그 순환을 반복한다.
내가 무슬림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하루 5번 기도하고, 사원 신축에 헌금하고, 배교자/불신자에 맞서 싸우는 것이 의미다.
내가 공산주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내 인생의 사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이다. 계급 의식을 일깨우려고 팸플릿을 작성한다. 파업과 시위를 조직한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를 착취하는 브랜드를 보이콧한다.
(반대로 나는 한국인이라는 국가와 민족 이야기를 믿는다면,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을 비판하고, 노 재팬 스티커를 차 범퍼에 붙이고 다닐 것이다.)
나의 참다운 정체성을 규정하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이야기의 모든 사례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이야기의 규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시온주의 이야기를 보자. 오직 유대인만 주인공이고, 지표면의 0.005%를 차지하는 지역, 세계의 아주 조그만 부분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중국 왕조나 뉴기니의 부족들에게는 어떠한 의미도 줄 수 없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전체는 그것을 신성시한다.
시오니즘은 이스라엘이 유대인들의 영원한 수도라고 말하지만. 영원은 최소 138억 살이다. 현재 우주의 나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기껏해야 5000년 전에 세워졌고, 유대인의 역사는 기껏해야 3000년이다. 도무지 영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인 대부분의 상상을 다 채우고, ‘영원’으로 간주하기에는 충분하다.
모든 이야기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내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모순이 전혀 없는 완전한 이야기가 필요하지는 않다.
이야기는 2가지 조건만 있으면 된다.
첫째. 내가 맡을 어떤 역할을 부여한다. 뉴기니 부족민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믿을 가능성은 낮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뉴기니 부족민에게 어떠한 역할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중요한 배역을 맡기는 대본만 좋아한다.
둘째, 좋은 이야기는 무한히 클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나’를 넘어서는 스케일이어야 한다.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엇 안에 나를 자리함으로서 나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물론 여기에도 **‘더 큰 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위험은 존재한다. 내 삶의 의미가 노동자 계급이나 폴란드 민족을 돕는 것이라면, 그 노동자 계급이나 폴란드 민족은 무엇에게 의미가 있는가?
세계는 거대한 코끼리 등 위에 자리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그 코끼리가 어디 서있는지 묻자 그는 큰 거북의 등 위에 서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그 거북은? 훨씬 더 큰 거북의 등 위에.
그 큰 거북은? 그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건 신경쓰지 마시오. 거기서부터는 계속 거북이니까’
스토리텔링의 결정적 법칙은, 이야기가 청중의 스케일보다 크기만 하면, 최종 범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10억년 된 신을 위해서나, 1천년된 민족을 위해서나 똑같이 살인적인 광신주의를 내보일 수 있다. 사람들은 큰 수에 밝지 않다.
우리가 우주에 대해서 아는 사실들을 고려해보면, 우주와 인간 존재에 관한 궁극의 진실이 이스라엘이나 독일 민족주의에 있다고 믿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전체 시간과 공간, 빅뱅, 생명의 진화를 무시하는 이야기는 진실의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사후에 무엇인가를 남기려는 소박한 희망을 갖고 있다. 100년 후에도 읽힐 시를 남긴다거나. 내 자신과 손주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거나.
문화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유전자를 남기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결국 긴 세월이 지나면 문화적, 생물학적 유전자는 모두 잊혀진다.
(…)
유전자나 문화를 남길 수 없더라도,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누군가를 도우면 그 누군가는 그 뒤에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 전반을 기여하는 거대한 사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나름의 유익함이 있지만, 결국 맨 처음의 의미가 어디서 나오는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현자가 말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지상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소”
우리가 아는 과학적 지식에 따르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다양한 문화, 종교, 부족들이 발명한 수천 가지 이야기 중에서 어느 하나도 ‘진실’인 것은 없다. 모두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원하는데, 어떤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것이 틀린 답이라는 뜻이다. 이야기라는 이유로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주는 이야기처럼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 다음 어떤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할 첫번째 사실은, 당신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모든 우주적인 드라마를 부인했다. 우주는 짜인 각본이 없고. 그것을 창조하는 인간에게 달렸다고 말한다. 너가 원하는 의미를 창조해라.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고 삶의 의미다.
고대 불교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고대 불교는 모든 우주적 드라마를 넘어서, 자유주의의 기반인 인간의 느낌. 인간의 내적 드라마까지 부인한다.
우주는 의미가 없으며, 인간의 느낌에도 의미가 없다. 그것은 단지 덧없는 떨림이다. 특별한 목적 없이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부처는 우주의 세가지 기본 현실을 설파했다.
-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 변하지 않는 본질은 없다.
- 완전한 만족도 없다.
고통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영원한 본질이 있으며, 그것을 찾아 연결하면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영원한 본질. 의미를 부여하는 것. 신. 국가. 영혼. 진정한 자아. 혹은 사랑.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한다. 그것을 얻지 못하면 가로막는 것에 대한 증오심이 생긴다.
부처는 생에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다.
그저 우리 삶의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의미없는 현상에 집착하거나 동일시하는데서 오는 고통에서 해방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