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
문학 얘기가 나오니 묵혀두었던 이 주제를 꺼내야겠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입니다. 올해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입니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레전드인 이영도 작가 작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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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의 소설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두 개를 꼽는다? 1997년 작 <드래곤 라자>와 2003년 작 <눈물을 마시는 새> 이 두 개일 겁니다.
<드래곤 라자>는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하며 발랄한 판타지 소설입니다. 인기가 가장 많고요.
<눈물을 마시는 새>는 유니크한 세계관과 이영도 특유의 철학적 문체가 잘 어우러진 소설입니다. 골수팬이 가장 많죠.
이영도 작가의 경우 최근작으로 갈수록 더 진지하고 난해해지며 예술적인 소설이 됩니다. 사실 저도 최근 소설들은 재미가 별로…
그래서 입문용으로 ‘드래곤 라자’를 추천드립니다. 판타지 소설을 평소에 안 보시는 분이라도 누구나 재미있게 볼만한 소설이에요.
처음에는 유쾌한 개그와 언어유희, 다음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모험 활극에 빠져들어서 보게 되는데요. 그런 스토리가 궁금해서 따라가다보면, 중간중간 유려한 문체로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철학적 대화가 스며들어있는데 그 뒷맛이 이영도 작품의 백미입니다.
이영도 소설의 유니크한 맛은 대표 명대사로도 알 수 있는데요.
원피스: ‘난 해적왕이 될 거야!’
진격의 거인: ‘심장을 바쳐라’
드래곤 라자: ‘나는 단수가 아니다’
이게 무슨 철학책 대사냐고요? 맞습니다. 모험 판타지 소설인데 갑자기 이런 대화가 나와요. 근데 뜬금없는 게 아니라 이미 스토리에 푹 빠져있는 독자가 무슨 뜻인지 알아먹게끔 만듭니다.
주인공 후치가 드래곤에게 인간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는 대사를 하나 보여드릴게요. 아는 사람은 알텐데 여기가 심금을 울리는 장면입니다.
> “하나가 아니에요! (중략) 영원의 숲, 영원의 숲 아시죠? 거기서는 자신이 자신을 죽이게 되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중략) 나가면 그 사람은 사라져 버려요! 나라는 존재가 아무리 남아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잊어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아직까지 그걸 모르세요?
> ‘나’라는 것은, 나라는 것은 이 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것들에 다 내가 있어요. 그것이라고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때 내가 있는 거라고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요, 그것이 인간이에요!!”
아무튼 이영도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면 ‘드래곤 라자’로 시작하는 걸 추천드린다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맛이 꽤 괜찮았다면, 이제 ‘눈물을 마시는 새’로 오실 준비가 된 거죠.
대부분 판타지/무협/게임 등 장르 소설은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합니다. 작가마다 차이는 있지만요. 판타지에는 드래곤이 나오고 엘프가 나옵니다. 무협에는 화산파가 나오고 마교가 나와요. 게임에는 상태창과 S급 헌터가 나오는 식이죠. ‘드래곤 라자’도 전형적인 톨킨 판타지 세계관에 기초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해리포터, 에반게리온, 스타워즈, 듄 등 골수팬이 많은 소설이 흔히 그러하듯이, <눈물을 마시는 새>는 그 어떤 소설과도 다른 독특한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눈마새 세계에서는 인간 외에도 ‘나가’, ‘레콘’, ‘도깨비’라는 종족이 인간과 같이 살아갑니다.
‘도깨비’는 실제로 한국의 전통 설화에서 따온 설정이 많아요. 씨름과 이야기를 좋아하고 기골이 장대하다든지 하는 것 말이죠. 무엇보다 도깨비불을 자유자재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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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콘’은 거의 순수하게 이영도가 창조해낸 가상의 종족이에요. 깃털과 수염볏, 부리가 있어서 약간 닭-인간 같은 느낌인데요. 하지만 엄청난 거구이고 레콘 1명이 인간 군대 1천명을 대적할 정도로 엄청나게 강합니다. 그야말로 쌉 테토남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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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비늘이 있고 변온 동물이라는 점에서 약간 파충류 인간 같은 느낌인데요. 굉장히 지능이 높고 이성적입니다. 정신적 능력이 뛰어나서 서로 ‘니름’이라는 텔레파시로 대화를 하고, 몇몇 나가는 다른 동물을 정신 억압하기까지 합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성인이 되면 심장을 뽑는데요. 심장이 안전한 동안 나머지 몸은 토막나도 죽지 않고 재생되는 거의 반 불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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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간’. 인간은.. 아무 능력이 없는 진짜 그냥 우리 같은 인간입니다. 대신 가장 수가 많고 유일하게 ‘왕’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밀도 있는 사회 제도와 집단을 이뤄서 살아가죠.
이 종족 세계관이 정말 재미있는 점은, 각각의 종족은 마치 음양오행처럼 서로 물리고 물리는 상생 상극의 균형을 맞춘다는 점인데요. 절묘한 밸런스를 자랑합니다.
도깨비는 불을 쓸 수 있고 이 불은 만약 맘먹고 쓸 경우에 10만명도 태워죽일 수 있는 천재지변의 힘인 반면, 도깨비는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을 자기가 죽는 것보다 싫어하고 피를 절대로 보지 못합니다.
레콘은 지상 최강의 전사이고 혼자서 군대를 박살낼 수 있지만, 개인주의자들이라 집단을 형성하지 않고, 무엇보다 ‘물’을 엄청나게 무서워합니다.
나가는 불사의 재생력이 있지만, 변온 동물이라 추위에 약해요. 그래서 세계의 반을 자기들이 차지하고 살지만 북쪽으로는 올라오지 못합니다.
인간은.. 약한데 집단이 가장 강한 느낌? 그냥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너무 우리랑 똑같아서 그런가 어떤 특이한 강점도 약점도 없다고 느껴지는데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종족이 신에게 받은 강점은 무엇인가? 라는 게 소설의 중요한 주제로 나오죠.
실제로 각 종족의 신은 4원소를 상징합니다. 도깨비는 ‘불’이라서 ‘자신을 죽이는 신’. 레콘은 ‘땅’이라서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 나가는 ‘물’이라서 ‘발자국 없는 여신’. 인간은 ‘바람’이라서 ‘어디에도 없는 신’을 섬기죠. 마치 4원소처럼 각 종족이 상호 보완과 견제가 되고 그게 스토리의 긴장을 이끌어나갑니다.
이러한 종족적 특성으로 인해 독특한 역사가 생겨납니다. 나가들이 세계의 남쪽 절반을 지배하고 나머지 인간, 레콘, 도깨비 종족은 북쪽에 몰려 삽니다. 인간들은 나가에게 침략당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자신들의 구심점이 될 왕을 항상 찾고 있는 중이죠. 레콘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도깨비는 싸움에 관심이 없지만, 대신 갖고 있는 특수능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요. 그 와중에 인간 대 나가의 대결 구도로 전쟁이 진행됩니다. 이게 눈마새의 주요한 다이나믹스라고 하겠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당연히 이렇게 직접적으로 설명이 나오지는 않고,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이 종족의 특성과 사회 문화 역사를 알아서 학습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좀 유니크하다보니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고 그래서 초반에는 약간 재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총 4권의 책 중 1권 절반 정도를 넘어가게 되면 인간, 레콘, 도깨비, 나가로 이루어진 주인공 일행이 반지 원정대처럼 팀을 이뤄 떠나게 되면서 스토리 전개에 속도가 붙는데요. 여기까지만 한번 읽으면 멈출 수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다음이 궁금해서 계속 읽게 돼요.
더 나아가서 소설 속 캐릭터들의 명장면과 이영도의 설계, 문체에 관해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이게 진격의 거인 같은 거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작품 해석을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스포가 되어버리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보신 분들이 많아지면 그때가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만화나 영화는 없지만 그나마 오디오북이 퀄리티가 좋습니다. 그래도 소설이라 약간 입문하기 어렵다면 이종범의 설명회 영상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