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사나 명상 코스 일기: Day 5

2025. 11. 19·published in 1일1글

어제 ‘상카라’(Shangkara)에 대해서 들었다. 상카라는 반응(reaction)이다. 즐거운 것에 대해서는 계속 유지되었으면 하고, 불쾌한 것에 대해서는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갈망(craving)과 회피(aversion) 반응을 상카라라고 한다.

마음은 계속 상카라를 만드는 버릇이 있다. 너무 깊숙하게 들어와있어서 우리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버릇이다.

비파사나를 가르치는 고엔카 선생님이 말하길, 이 상카라는 계속 쌓이게 되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 되고, 결국 끝없는 불만족/고통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하지만 의문도 든다. 좋은 상카라도 있지 않은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분좋은 건 좋아하고, 기분 나쁜 건 피해야한다.

예를 들어, 불속에 손을 넣으면 엄청난 불쾌함을 느끼겠지? 그때 상카라를 만들지 않으면 (회피 반응을 하지 않으면) 손이 타게 되는 것 아닐까? 반대로 아름다운 노을을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그것을 즐기려면 내가 그것을 추구하고 유지하고 싶어하는 반응을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필수적인 반응과 집착은 뭐가 다른 걸까?

5일차. 여전히 의문은 있지만, 그래도 뭔가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확실히 전에 10분씩 앱으로 명상을 했을 때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가는 중이다. 명상을 왜 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여기 시설에 대해 잠깐 적어보자. 한마디로 말하면, 굉장히 불편하다. 날씨가 좋아서 덥거나 춥지는 않다. 그치만 문 앞의 복도가 엄청나게 좁다. 명상 센터 전체가 좁다.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걷는데 30초면 충분하다.

화장실, 샤워실도 있다. 하지만 샴푸 하나를 놓을 선반조차 없다. 이불과 시트는 세탁해서 주지만, 문틀이나 창틀을 보면 좀 더럽다. 진짜 최소한의 시설만 갖춰놓을 걸 보니 군대가 떠오른다.

물론 불평불만을 하긴 어렵다. 난 돈도 내지 않았고, 공짜로 명상을 배우고 있으니까. 나는 최저 생활 환경의 최저 기준이 낮은 편이고, 이제 요령도 생기고 적응도 되었다.

시간표도 익숙해졌다. 사실 시간표라 해봤자 밥 먹고, 자는 시간 뺴면 다 명상이다. 의무적으로 명상 홀에 가야하는 그룹 명상과, 방에서 해도 되는 자율 명상 시간이 있다. 아무래도 홀에서는 빡세게 하게 된다. 자율명상 때는 힘들어서 그냥 침대에서 멍 때릴 때도 많다.

자율명상 시간에는 사람들이 눕거나 자지 않는지 가끔 한번씩 조교가 점검하러 온다. 이제 조교가 오는 시간까지도 파악했지만, 그대로 양심상 명상 시간에는 눕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앉아서 존다.

아침, 점심, 저녁 이후 쉬는 시간에는 무조건 잔다. 어차피 할 것도 없다. 쉬는 시간 이후는 빡센 그룹 명상 시간이다. 체력을 회복해놔야 한다. 그렇게 하루에 10시간 가량을 명상하고 나면, 씻자마자 기진맥진해서 곯아떨어진다.

그룹 명상 시간에는 고엔카 선생님의 음성 가이드가 나온다. 영어로 나오는데 모국어가 다른 사람은 별도로 기기를 주고 번역된 음성 가이드를 헤드폰으로 듣는다. 절반 정도는 영어로 듣고, 나머지 절반은 각각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힌디어, 일본어 등 자기 언어로 듣는다.

신기한 건 이 모든 시간표와 환경이 수십년 동안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엔카는 자신이 처음 자신의 스승인 ‘사야지 우 바킨’에게서 명상을 배웠을 때 얘기를 가끔 해준다. 그때가 무려 1960년대였는데도 이 10일짜리 코스와 시간표의 구성, 센터 환경이 다 비슷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10일 코스의 디테일이 그렇게 오랫동안 전해내려온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많은 것이 익숙해졌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지루함이다.

하.. 정말 시간이 안간다. 4일차에 비파사나를 배웠다는 기쁨도 잠시, 하루 종일 한 10바퀴 정도 돌리고 나니까 지겹다. 오늘 자율 명상 시간에는 하염없이 침대에 앉아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았다.

진짜 너무 심심해서 무슨짓까지 했냐면, 뭐라도 읽을만할 게 없을까 가방을 뒤졌을 정도였다. 책과 전자기기는 들어올 때 전부 반납해서 내 가방에는 그냥 옷과 생활용품뿐이었다. 텍스트라곤 여권과 혹시 몰라서 프린트해온 여행자 보험 증서와 설명서뿐이었는데. 너무 심심하니까 30페이지짜리 보험 설명서를 천천히 읽었다. 나가면 읽고 싶은 거 잔뜩 읽어어야지..

5일차 저녁 설법. 1시간이 굉장히 빨리 갔다. 고엔카 선생님은 확실히 설법을 잘한다. 전형적인 목사님 스님 말씀처럼 지루하지가 않다.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잘 섞어가며 핵심을 잘 전달하는 편이다. 왜 재야에 묻혀있던 비파사나 명상이 이 사람 덕분에 이렇게 대중화되었는지 알 것 같다.

아무튼 오늘 설법을 듣고 나니 더 클리어해졌다. 모든 지각, 인식은 ‘몸 내부의 감각’을 만든다고 한다. 우리는 내부 감각에 대해 반응(싫다, 좋다 = 상카라)을 무의식적으로 하면서 살아간다. 그게 만들어지고 쌓여서 단순히 들고 나는 하나의 현상을 보고, ‘나’라는 고정된 개념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좋은 것은 당기려고 하고 싫은 것은 밀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들고 나면서 변화하고 나는 거기에 대해 통제력이 없기 떄문에, 그 나라는 개념과 집착은 고통이 된다.

이 고리를 끊는 방법이 바로 ‘Observer, Do not react’ 다. 몸의 감각에 대해서 반응하지 말 것. 알아차리되 반응하지 않는다. 좋음, 싫음의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 연습. 그것이 Equanimous, equanimity (평정심)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듣는다.

외부의 감각이 곧바로 정신적 반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몸 내부의 감각으로 이어진다는 점. 몸의 감각이 핵심이라는 점이 정말 흥미롭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의문점을 낳는다. 누군가 나에게 욕을 했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내 마음속에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감각으로 먼저 반응하고, 그 반응을 읽은 내 마음에서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이잖아?

(나중에 10일 코스가 끝나고 나와서, 챗GPT와 여러가지 논문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몸의 내부수용 감각은 감정을 생성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뇌과학 연구 결과들이 많았다. 궁금하면 Interoception, somatic marker 등으로 검색해보자)

내 말로 다시 정리해보자.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똥을 던졌다. 그걸 맞고 나는 ‘화’를 참는 게 명상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똥을 던졌을 때, 나는 그것을 오감을 통해 지각한다. 그리고 나에게 날아온 것이 똥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마음이 아닌 몸에 일어나는 감각이 선행한다. 일반적으로는 그 감각에 반응해 ‘화’라는 감정이 올라온다. 하지만 명상이 추구하는 바는 그 감각 자체를 ‘기분 나쁜 것’이라고 이름붙이거나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즉, 애초에 화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작용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보통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감각에 반응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하는데. 그게 바로 명상이라는 것.

고엔카 선생님은 해탈한 인간이 되는데는 비파사나라는 이름도 중요하지 않으며, 부처의 말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지적인 이해가 아니다. 실제적인(actual), 경험적인(experiential) 수준의 연습이다.

‘몸의 내부 감각을 관찰하고 반응하지 않는 연습’이 중요하고, 그것이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서 반응하지 않음이 계속되면, 어느 순간 최종적으로 ‘나’라는 개념이 희미해진다고 한다. ‘나’를 형성하는 것이 반응(상카라)이기 때문이다. 장작이 없으면 불이 타지 않는다.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다니, 그게 가능할까? 예전에 불 속에서 타죽으면서도 미소지은 얼굴과 부동자세를 유지했던 대스님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수준의 죽음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이겠지만.

생각해보면 현대인의 고통은 대부분 피지컬보다는 멘탈이다. ‘얘는 내 말을 왜 안 듣지? 사람들 앞에서 쪽팔려서 못다니겠다’ 같은 이런 고통들은 ‘반응하지 않음’을 통해서 녹여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생각이 너무 많았다. 잠이나 자야지…